분노의 시대, 용서의 실종 - 두 개의 거울이 비춘 우리의 민낯 - 메디잇

즉각적 분노, 영원한 단절우리는 참 쉽게 화를 냅니다. SNS에서는 매일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쏟아지고, 일상에서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날선 목소리들이 가득합니다. '참을 인(忍)' 자가 사라진 시대, 용서는 나약함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병원 원장이자 EMR 연구소장으로 살아가는 저는 최근 한 달 사이, 이 메마른 시대의 양면을 모두 경험했습니다.첫 번째 거울: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그날 오후, 70대 환자분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며느리의 전화 예약 변경 과정에서 발생한 사소한 갈등. 객관적으로 보면 양쪽 모두 조금씩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일방적으로 며느리 편을 들며 직원들을 질책했고, 의료진에게까지 격앙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15년. 그분이 우리 병원과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시지요. 어르신. 처방전과 모든 검사기록 출력해서 드릴게요. 더 이상 진료는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제 입에서 나온 차가운 선고였습니다. 직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저 역시 분노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오랜 인연을 단칼에 잘라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정의로운 리더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두 번째 거울: 용서를 구하는 떨리는 손3주 후, 제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한 병원 원장님이었습니다. 우리 EMR 시스템 버그와 직원 실수로 당일 여러 환자 기록이 누락된 상황. 의사만이 작성할 수 있는 기록들은 복구가 불가능했습니다."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가운 분노. 보상과 법적 책임을 언급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3주 전 제가 내뱉었던 그 단호한 거절이 떠올랐습니다."한 번만 봐 주십시오..."전화기를 든 제 손이 떨렸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한 번의 기회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일인지를.분노 중독 사회의 비극현대 심리학자들은 우리 사회가 '분노 중독'에 빠져있다고 진단합니다. 즉각적인 감정 표출은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그 대가는 관계의 파괴입니다.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건네며 말합니다. "이것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시오." 그 한 번의 용서가 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달 음식이 5분 늦으면 악평을 남기고, 직원의 작은 실수에 본사로 항의 전화를 겁니다. 15년 단골도 한 번의 갈등으로 내치고, 사과하는 사람에게도 끝까지 책임을 묻습니다.용서의 경제학긴 침묵 끝에 그 원장님은 한숨과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그 한 마디가 저와 불안에 떨던 직원들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시스템을 전면 개선과 돈독한 파트너쉽을 약속드리며 통화를 마쳤습니다.용서는 손해가 아니라 투자였습니다. 관계의 회복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습니다.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경쟁 사회의 피로감, SNS가 부추기는 즉각적 반응, 여유 없는 일상...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될까요?15년 환자분과의 이별이 이제는 아픕니다. 제가 그때 한 번 더 참았다면, "어르신, 저희도 속상합니다. 함께 해결해보죠"라고 말했다면, 그분도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요?용서가 순환하는 사회를 꿈꾸며공자는 "己所不欲 勿施於人(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이라 했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베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우리 모두는 실수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나 용서받고 싶은 순간이 있고, 용서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분노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의 선순환을 시작할 사람은 바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입니다.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화내기 전에 숨을 한 번 더 쉬어보면 어떨까요? 비난하기 전에 "괜찮아요"라고 먼저 말해보면 어떨까요?완벽한 사회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를 용서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회가 있을 뿐입니다.분노는 1초, 후회는 10년. 용서는 1초, 감사는 평생.